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토 다카아키 (문단 편집) === 내각총리대신 취임 === || [[파일:external/www.kantei.go.jp/souri24.jpg]] || || 24대 총리 취임 후 || 가토 다카아키는 [[1924년]] [[6월 11일]]부터 [[1926년]] [[1월 30일]]까지 599일간 내각총리대신을 맡게 된다. 이 기간 동안 선거공약이었던 '25세 이상 [[성인]] [[남자|남성]]에게 [[재산]]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[[보통선거]]의 실시'를 위해서 '보통선거법'을 통과시켰다. 또한 [[소련]]과의 외교관계를 최초로 개설하기 위한 [[조약]]인 약칭 '일소기본조약'을 체결했다. 한편 [[1925년]]에는 '[[치안유지법]]'을 통과시켰다. 당시 [[일본]] 내 식량 부족현상이 이어지는 터라 전국적으로 [[쌀 소동]]이 이어졌는데,[* 같은 시기에 [[일본 제국]]의 [[식민지]]였던 [[조선]]에서 [[산미증식계획]]을 바탕으로 수확한 [[쌀]]을 남김없이 [[일본]]으로 보내는 바람에 [[조선]] 사람들은 굶주리고 더 나아가 [[아사]]하는 경우도 속출했다.] 가토 다카아키는 쌀 소동의 모든 책임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떠넘기고 대대적으로 탄압했다. 또한 공산주의자나 [[아나키즘|아나키스트]]가 중심이 된 사회운동(노동운동, 무정부운동 등)도 절멸시키려고 했다. 1925년 11월, 중국에서 [[장쭤린]]의 부하 [[궈쑹링]]이 [[반봉사건]]을 일으키자 처음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궈쑹링이 일본의 특수권익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[[시라카와 요시노리]] 관동군 사령관에게 지시하여 반봉사건 진압에 협조하도록 하였다. 그러다가 [[1926년]] [[1월 22일]]에 [[국회의사당(일본)|일본제국 의사당]]에서 [[폐렴]]이 악화되어 쓰러졌고, 6일 뒤인 [[1월 28일]]에 66세를 끝으로 사망했다. 사망 직후부터 이틀간 [[와카쓰키 레이지로]] 당시 내무대신이 권한대행하다가 1월 30일에 총리직을 승계하였다. 이후 [[다이쇼 덴노]]가 붕어하고 [[쇼와 덴노]]가 즉위하여 와카쓰키 총리는 [[다이쇼 시대]]와 [[쇼와 시대]]의 연결자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